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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일상.

영화리뷰,후기,감상문 - < 소년시절의 너, Better Days > / 더러운 세상속 어른이 되어야하는 우리들.

by 문라이트03 2020. 9. 3.

 

 

 

 

 

 

 

 

소년시절의 너 감상문,

감독 증국상, 

주연, 주동우, 이양천새

 

 

 

 

 

 

 < 소년시절의 너, Better Days >

더러운 세상속 어른이 되어야하는 우리들.

 

 

 

 

 

 

 

 

 

어느 순간부터 입소문이 나면서, 이 영화가 작품성있고, 정말 감동적이고 좋은 영화라는 평을 보게되었다.

그래서 시간이 없어서 미루다가 얼마전에 바로 극장에서 보게되었다.

보면서 느꼈던것은 정말 러닝타임이 꾀 길었다는 것과, 보면서 기가빨리고, 피폐하면서 힘들기 까지 했던 영화는 이 영화가 처음일 정도로 보면서 조금 힘들었고, 살짝 버거웠었다.

왜냐면 우리도, 아니 나 역시도 그 시절에 그처럼 힘들었고 버거웠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누군가 의지할 만한 어른, 사람, 친구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나는 그 순간들과 그 시간들을 버티고 견디기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시절의 너, 그리고 소녀시절의 너, 어떤 사람이었고, 지금은 어떻게 변한 어른이 되었나요.

내게는 이 영화가 그렇게 나에게 물어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소녀시절, 나에게는 베이 같은 위험하면서 불안하지만 영혼을 가진 친구는 없었다.

외로웠지만, 그저 혼자 묵묵히 그 시간을 고통속에서 견뎠을 뿐, 베이같이 영혼을 나눌 친구도, 서로 같이 힘이 되어주는 존재조차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나는 첸니엔이 너무 안타깝고 보면서 마음이 아퍼서 많이 울었다.

왜냐면 왕따라는 문제는 결코, 먼 곳, 나와는 다른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반에서 당신은 가해자, 그리고 피해자, 목격자가 된다.

그 중에서 무엇에 속해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소년시절의 너는 그 중 한명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체니엔은 처음에는 목격작였다. 하지만 피해자의 죽음을 위해줬다는 사실만으로 후에 

가해자들의 새로운 장난감, 즉 왕따의 표적이 되어 심한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친구라는 의미로 다가와 체니엔을 괴롭히는 아이들, 이 영화는 친구, 어른, 성장, 그리고 죽음, 성공주의 , 어떤 의미 없이 공부에 메달려야만 하는 학생들에 대한 슬픈이야이자, 뼈저린 현실을 영화로 아프게 포장한 리얼리티영화였다.

영화속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 어떤 도움도 되어주지 않는다. 버리거나, 혼내거나, 자신이 보상받지 못한 멋진 미래를 아이에게 투영하면서 그 꿈을 강요하고, 공부에 내모는 부모들.

나는 그들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결코 진정하고 성숙한 어른이 아니었다.

그저 해결하지 못한 개인적인 문제들, 고통 속에서 남을 통한 구원만을 바라고 어른이되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역시 자신의 삶과 똑같이 피폐하게 괴롭히고, 불행하게 만드는 그런 어리석은 어른들 말이다.

중국의 실제 학교, 학습주의, 그리고 그것만이 미래에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환경속에서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과 사회속에서 인간성이 상실해져가고 피폐해져가며, 배우는 것일라고는, 공부, 친구따위는 죽여만하는 경쟁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이다. 

이 영화가 진짜 중국사회는 비판하고자,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가 실화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라는 것은 확실했다.

분명 우리는 보았다. 때로는 목격자로, 타겟이 되기 싫어서 숨기거나, 애써 모른 척 하거나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아이들, 상처받는 아이들, 결코 행복하게 지금 그 순간을 버티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에대해 말해준는 아름다운 영화이다.

물론 정상적으로 친구들과 원만하게 교우하고, 행복하게 부모에게 사랑받으며 아이들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그 속에서 죽어만 가는 아이들도 있다. 아파하는 아이들도 말이다.

나 역시 소녀시절에 죽어가고 많이 아파했으니까 말이다.

예전에 어디서 이런 명언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시절 그들로 인해 그 고통으로 그 불행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고 말이다.

지금 모습의 죽어가고, 아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분명 사실대로 아프게 그려냈다는 것만은 감독이 이 시대의 왕따라는 것에 대해 진정 관심을가지고 아파하고, 바꾸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왕따라는 문제, 어쩌면 세상은 영화에서 보여준 것은 현실의 1프로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현실은 더 심각하고, 잔인하고, 살벌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정말로 죽이고, 때리고, 아무런 양심도, 가책도 느끼지 못한채 말이다.

그저 심심해서, 자기 기분을 조금 상하게 했다고 벌레를 죽이듯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이니 말이다.

이것이 돈 만 밝히고, 그 어디에서도 인간성, 올바른 가치관, 인성을 아이들에게 먼저 가르쳐주지 않았던 어른들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그들도 그렇게 컸겠지, 올바른 인성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돈과, 물질, 그리고 남과의 비교, 있어보이기 위해 가져야만 하는 것들, 꿇리지 않기 위해 가져야만 하는 그런 것들을 제일 중요시 하면서 컸던 거겠지.

그럴 수록 이 세상은 인간성은 상실하고,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과주의, 물질주의, 황금마능주의 만 커져가고 세상은 온통 괴물들만 득실거리게 되겠지.

왜 그렇게 현실이 변하고 있는 것일까, 왜 세상은 살아가려면 돈 이 제일 중요해졌으며, 왜 이 돈이라는 것은 인간을 왜 그토록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일까, 

잘살아가려고 돈을 버는 것인데, 왜 우리는 돈앞에서 괴물이되어가고, 결국 그 인간 그 밑바닥 이상을 보게 되는 것일까, 내가 조금 센치해져서 오바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정말로 왕따라는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 오래 깊이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원인과 문제, 거기에는 아이들이 있고, 그 위에는 아이들의 거울 어른들이 있으며,

그리고 그런 어른들 역시 사회라는 거대한 환경조직에서 분명 어떤 부조리, 비합리화는 겪으면서 그렇게 대물림되는 사회를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왕따는 결국 사회문제라는 것에까지 연결이 되는 것일까,

왕따가 없어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왕따는 결코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저 하나의 어린 짐승에 불과하다.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한 어른들 하나 없고, 때리고 학대하고, 내몰리고, 괴롭히고, 그런 어른들 속에서,

올바른 길따위는 전혀 가르쳐주지않는 자신의 인생의 책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섹스만을 통해 아이를 낳아야만 하는 그런 세상속에서

체니엔과 베이는 분명 아주 작디작은 양이자, 피해자일 것이다.

 

 

 

 

 

 

 

 

그들은 피해자이고, 그런 사회속에서 제일 밑에 속한 계층이자, 어떤 발악도 그저, 세상에 공허한 메아리일 뿐일 것이다.

그런 세상속에서 둘은 만나게 되었다.

너무나도 다른 둘, 하지만 둘은 친구다. 영혼이 서로를 알아보는 외롭고 고독한 두사람 말이다.

한명은 그런 사회속에서 노력한다. 우등생이 되어 이 사회에서 평범하게  지금보다는 다르게 적어도 인간이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 수있는 기회는 오로지 대학 그 기회밖에 없기에,

체니엔은 노력한다. 그리고 공부해서 오로지 대학을 목표로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모습이 결국 가해자들의 눈에 띄어서 체니엔을 고통속에 빠지게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베이는 다르다. 그는 이 세상속에서 너무나도 더럽고 더러운 어른들과 세상, 학교에서 빠져나오고

포기한다. 그는 혼자서 양아치가 되어 무시받지 않고, 위협적인 존재로 자신을 무장하고 지키면서 살아가기로 선택한다. 양아치와 우등생, 그 둘은 다르지만 분명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견디고 살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였다.

우등생 아니면, 양아치가 되는 길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아이들,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그들은 처음 보자마자, 서로를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더럽고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서로에게 빠지고 마음을 나눌 유일한 한 사람이라는 것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로지 친구의 자살만이 답이이기에..

자살, 결국에는 더러운 세상에 적응하지못하고 하게되는 마지막. 마음이 정말 아팠다.

문제가 무엇이기에, 우리 사회는 이렇게 아이들에게 잔인하고,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일까 해서 말이다.

나 역시도 어린 시절, 그렇게 무책임한 어른들사이에서 고통스럽고 수백번을 죽고 싶었던 마음을 견디면서 결국 살아왔었다. 어떻게 보면 그 시절은 내게 깊은 트라우마를 주게되었고, 때로는 아픈 성장통이자, 내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때론 너무 화가나고, 너무 아프고 아직도 힘들다.

나는 생각했다. 당시 학창시절에는 누군가는 웃으면서, 친구들과 그렇게 평범하게 살고 사귀고 하는 모습들이 정말 부러웠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평범한 아이들 중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정말로 가슴 아팠다.

어른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내 잘못이다. 문제를 겉으로 회피하고 수습하기 바쁘고, 물론 그들도 피곤하니까, 자신의 삶이 아니니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았겠지.

부모는 자신들의 인생, 돈, 무엇인가와 항상 싸우고 사느라 바뻐서 나같은 것은 돌아보고 챙길 여력이 없었다.

이 사회가 그러니까, 그렇게 자신하나 책임지고 살아가게하기 버겁고 너무나 힘드니까.,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엄청 욕했다, 그 어른들을 말이다. 나를 버리고, 비난하고, 아프게했던 그 어른들을 말이다.

나를 괴롭히던 친구들보다도 나는 정말 깊이 이 세상을 원망하고 싫어했다.

그리고 절대로 그런 어른, 그런 인간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렇게 살아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고, 그렇게 돈만 밝히고, 앞만보는 삶은 절대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나도 그런 그들을 닮아가고 살아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정말 너무나 역겨웠다. 그렇게 살기 싫다고, 그런 인간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렇게도 울었는 어린 나였는데,

왜 어른이 되면 모두들 그렇게 변하는지, 그놈의 돈이 무엇인지...

결국나도 그런 어른이 되어가는 것일까 그런 어른들 중의 하나일까...

엄청 두렵고 무서웠다. 내가 싫었던 그런 더러운 어른들을 닮아가는 어른이 되어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그들과는 다른 어른이 되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그들과는 다른 지혜롭고, 현명하고, 인간적이고,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겠다고 다짐했는데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나의 위선적이고 가식적이고, 더럽게 물들어 오염되어가는 나를 돌아보게 한 정말 아픈 영화중에 하나였다.

학창시절의 고통을 떠올려준 아픈 영화이자, 정말 깊이 현실적으로 나의 어린절에 대해 당신은 어떤 어른으로 컸나요?

하고 물어보는 것 같아서 찔리면서도... 나를 돌아보게 해주었다.

그렇게 아이는 세상을 증오하면서 커간다. 자신을 부정하고 괴롭히던 그 세상을...

아이가 어른이 되었다. 어떤 어른..우리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소년시절이었던 그때를 말이다.

체니엔과 베이는 내게 물었다. 임신한 형사에게 물었다.

이런세상에 아이를 낳는 것이 정말 아이를 위한 길일까요,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이런 더러운 세상에 그저 섹스하고 아이를 낳고, 버리고, 역겹다고 말이다.

이 말은 분명 지금 이 시대의 , 결혼, 가족, 출산 문제에 대해 아픈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우리는 왜 결혼하며, 무엇때문에 자식을 낳는 것일까, 

이 더러운 세상에 말이다... 그게 정말 자식을 위한 길일까. 너무 감정적으로 글을 써내려 가는 것 같지만,

나 역시도 비혼주의자이고, 평생을 그 의문속에서 살아가던 한 사람이였기에,

단순한 그저그런 청춘발랄연애영화로만 생각했던 이 영화를 보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영화는 그저그런 연애영화가 아니라, 정말 아프고, 아름답고, 슬픈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어떤 어른이 되어있을까, 

두사람의 연기는 정말 대단하고, 대단했다. 힘든 장면들에도 정말 그 두 주인공은 꼭 자신의 이야기처럼 연기하고 울고 웃었으니 말이다.

정말 어떻게보면 예술적이고, 내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은 영화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혼자서 쓸쓸하고 외롭게 살아가던 베이가 너무나 기억에 남고, 든든한 어른의 보호 없이 불안하고 거친 그런 세상속에서 혼자 살아가는 베이는 과연 어떤 어른이 되어있을까..

양아치가 된 어른, 아니면 그와는 반대의 길로 걷는 어른...

위태로워보이던 베이의 삶, 분명 나쁜 길로 충분히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따뜻한 어른의 손이 바른길로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커서 어른이 된다.

이제 너의 길을 찾아라고, 직업을 가지고 빨리 돈벌어다 주라고, 자신들에게 

아이들은 어른이 뭔지도 모른채., 자신의 영혼, 성숙은 무엇인지도 모른채 어른? 아니 애어른이 되어가야 한다.

사회에 내몰리면서...그렇게 대물림 되는 아프고 병든 사회.

 

 

 

 

 

 

 

 

결국 범죄자가 되거나, 말이다. 자신의 분신과 같던 아프고 외로운 체니엔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려고 희생하던 베이, 

커서 꼭 멋진어른으로 만나자고 하던 베이, 

결국엔 가해자들에게 져서, 살인을 하게된 체니엔, 나는 그들을 보면서 정말 현실적이고 아픈 아이들의 모습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체니엔을 괴롭히던 장면에서는 정말로 왕따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가해자 여자애 역시 돈많은 부자부모를 두고 그런 부모밑에서 하나의 사람, 인간으로 존중밭지 못한채, 부모의 욕망에 희둘리는 물건, 즉 인형처럼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면 그 아이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자신의 억눌러진 분노, 감정을 결국 자신보다 약한 약자에게 쏟아내는 모습에서 그 아이이도 역시 돈많은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채 억눌려 사는 아이 중에 하나였다.

돈 많고 사랑이 없는 집,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주던 부모, 아이는 그런 부모를 보면서 돈만 있으면 무서울 거 없는 세상, 즉 자긴의 기분대로 행동하고 죄책감은 가질 수도 없는 비인간으로 커간다.

자신의 돈만 보고 다가오던 친구들 속에 그 아이.

어쩌면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 체니엔이 거슬리거나, 어떤 관심이었거나, 무료했던 자신에게 어떤 자극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가해자들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 단순히 심심해서 괴롭혔다기에는,

잔혹할 정도의 분노 말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피해자 역시 그 속에서 강해져야만 했을 것이다.약했던 어렸던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당하지 않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를 타켓으로 삼아야 했던 또다른 친구들.

가해자의 친구들 역시 그런 그녀의 돈, 허세, 그런것들이 모두 강해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받지 못한 불안한 마음을 그 친구에게 의지하면서, 힘을 키우고 싶었던 것이겠지.

그렇다고 가해자를 옹호할 생각은 죽어도 없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피해자의 상처는 평생 아물수 없는 상처이자, 고통으로 남기 때문이다.

슬펐다 홀로 집에서 떨면서 외로이 커가던 체니엔의 모습이.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웠을까 싶어서. 엄마와의 통화에서 홀로 숨죽여 울던 체니엔의 모습.

그리고 자살한 친구를 가려주고 덮어주었던 마음. 

결국엔 우리는 피해자, 목격자, 가해자 이다. 학생, 학교, 왕따. 선생님에 대해 깊은 질문과, 의문들이 계속 떠오르고 생각해주었던 영화. 

그래서 감동, 작품성, 예술까지 느낄 수 있었던 아주 좋았던 영화.소년시절의 너

그리고 미래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오로지 성공한 미래를 위해, 지금과는 다른 멋진 미래를 위해, 공부하고 살아가고 내달려가지만,

더러운 지금에서 벗어나기위해서 발버둥을 치지만, 현실은 우리를 무지비할 정도로 가만두지 않기에,

과연 미래라는것이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미래는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떤미래가 존재하는지.

어쩌면 미래라는 것은 존재하지 오히려, 눈앞에 보이지 않는 신기루이자.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라고 말이다.

지금의 추악한 현실에서의 미래란 것은 아이들을 그저 고통속에 내몰며, 더욱 괴로워 질 뿐이라고 말이다.

결국은 사회는 두 아이들현실을 잔혹하게 만들어 버린다.

어른들은 두 아이에게 묻는다. 왜 그랬냐고, 뭐가 문제냐고, 왜 제대로 살 수 없냐고 말이다.

아이들은 죽어간다.. 그런 사랑없는 경쟁과, 비교, 어른들의 결코 이루지 못할 희망차고 빛나는 미래의 꿈 속에서 말이다.

어른들은 네버랜드를 꿈꾼다. 비루한 현실에서 자신을 탈출 시킬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말이다.

그것이 자신의 아이든, 남편이든, 애인이든 말이다.

오만하고, 불만족으로운 자신과 현실을 돌아보고 삶에 감사하고 책임지고 성숙한 어른은 진정 없는 것인가.

사랑 없는 가족들은 분명, 사회에 문제를 낳을 것이다.

잔인해지는 사회속에서 현실속에서 가족들의 갈등속에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사라지는 순수한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멋지고 슬픈 영화 소년시절의 너.

주변사람들에게 너무나도 꼭 추천해고 싶은 영화. 살면서 한 번은 꼭 봐야할 영화.

 

 

 

 

 

 

그래서 원 제목이 Better Days이겠지.. 더 나은 날, 더 나은 세상, 고통스럽고 비루한 지그므이 현실보다 더 좋은날이 있을거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갈수록 극악무도해지고, 잔인해지고, 악해져만 가는 이 세상의 아이들에게서 과연 미래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영화 소년시절의 너.

너는 어떤 그 시절에 어떤 아이였으며, 지금은 어떤 어른이 되었는가...

 

 

 

 

 

 

 

 

이 감상문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망상적인 저의 생각들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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